[그러세요.]옷을 주섬주섬 걸치며 방에서 나오는 진숙에게 가은이 쳐다도 않고 말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며 뭔가를 노트에 열심히 적고 있었다.사내는 옷장에 있는 이불을 하나만 남기고 모두 꺼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움직여 옷장 속의 베개를 집으려고 할 때 뒤에서 진숙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가은이 손을 내밀자 진숙은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줬다.[못 만났습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순자의 미모 하나만 봐도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5대 독자 태복에게 시집을 올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시집을 온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근에서 소문난 정신병자였다.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술을 한잔 걸친다든지 비라도 내리면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며 미치광이 짓을 해댔다.오만재는 범인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사람이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오만재가 놈을 뉴스에서 다시 보았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는 옴니버스 극장을 보다가 범인과 관계되는 무엇을 보고 제보를 하려다 살해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확신에서 최 반장은 옴니버스 극장에 매달리고 있었다.[어떻게 보면 칼기를 폭파시켰던 마유미와 비슷한 케이스겠지요. 마유미의 얼굴이 예쁘지 않았다든지 최고의 엘리트가 아니었다면 그런 테러를 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었겠어요? 만약 그 때 마유미가 죽고, 반대로 자살에 성공한 그 남자 공작원이 살아서 잡혔다면 국민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일종의 팬레터(?)는 고사하고 용서하고 살려주자는 여론이나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모델이던, 탤런트던, 영화배우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 옴니버스 극장이 시작되기 전에 나갔던 광고부터 구해다 이 아이에게 보여주시오. 우리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소. 범인이 도주를 하기 전에 빨리 신원을 파악하고 잡던지 아니면 사살을 하던지 해야 합니다.]수사본부장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 있던 경찰들이 각자의 휴대폰과 무전기를 이용해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
[어제까지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어쩌면 좀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그래요, 결혼!][][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나요?]시간이 지나자 진영의 목에서 흐르던 피도 멈추고 악마의 동작도 멈췄다. 피로 목욕을 한 악마는 욕조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몸을 둘러쌓고 있던 피가 굳으며 마른 논바닥처럼 금이 가고 딱딱하게 변해 뚝뚝 떨어져 나갔다.수사본부가 다시 서울로 옮겨간 뒤, 최 반장은 지금까지의 피살자들과 스타일이 비슷한 연예인들의 신상명세와 사진을 들고 호텔로 세준을 찾아갔다.세준이 기거하는 방은 노트북컴퓨터 한 대와 휴대용 프린터, 그리고 수많은 서적들과 논문,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어지러 져 있어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호텔방이라기보다는 서재에 가깝게 보였다.[불편한 곳은 없는디, 다리에 감각이 없구만요. 어떻게 된 거지라?]놀란 사내는 밀랍 같은 얼굴을 하고 진숙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키는 대로 옷장문을 열었다.서로 잡아당기다가 국발이 쥐고 있던 손수건의 귀퉁이가 찢어져 나갔다.[나는 지금 정확한 이름도 나이도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고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렸을 적에 기억상실에 걸렸던 때문이죠. 추정 나이로 열 살쯤 먹었을 때인데, 어느 날 내가 정신을 차려 보니 대전의 어느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고][그 책이름이 뭐였지?]H호텔 커피숍은 외국인들과 내국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최 반장과 조 형사였다. 외국인들은 편하고 화려한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반면 내국인들은 대부분 정장차림이었는데 최 반장과 조 형사만이 촌스러운 구식 바지에 흰색 티셔츠, 그리고 노타이였다.시골이라서 공기가 무척이나 맑구나.[좋습니다.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는 우희완이 데뷔한 지도 얼마 안돼서 여러 비중 있는 프로에 겹치기 출연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떤 비리에 관련돼 있기 때문이라던데 그 소문을 알고 있습니까?]진숙이 집에 도착해보니 편지가 한 장 와 있었다. 죽기